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4차 중동전쟁 (문단 편집) === 바르레브 선/골란 고원 돌파와 순항/탄도미사일 공습, 이스라엘의 위기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1973_sinai_war_maps.jpg|width=100%]]}}} || || [[1973년]] [[10월 6일]] ~ [[10월 15일]]: 시나이 반도 || 이전 세 차례에 걸친 중동전쟁이 모두 이스라엘의 압승으로 끝난 것에 비해,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군은 많은 군인들이 휴가로 인한 인적공백과 기습적인 대규모 공격으로 인하여 메이어 총리를 비롯한 수뇌부가 '나라가 망한거 아니냐'는 절망에 빠졌을 정도로 초반에 매우 큰 피해를 입게 된다. 개전 당일, 이집트군은 수에즈 운하 건너편에 이스라엘군이 건설한 거대한 모래벽과 영구진지로 구성된 [[https://he.wikipedia.org/wiki/%D7%A7%D7%95_%D7%91%D7%A8-%D7%9C%D7%91|바르레브 선(Bar-Lev Line)]]을 돌파하기 위한 [[바드르 전투|바드르]] 작전(Operation Badr)을 개시했다. 먼저 사전에 8천명이 넘는 [[특수부대]]를 이스라엘군 경계가 느슨한 곳으로 도하시켜 요새 후방과 이스라엘군의 기동로 근처에 매복시켰고, 철저한 [[공격준비사격]] 뒤 도하를 개시했다. 이때 이집트 육군 [[공병]]은 [[동독]]에서 수입한 고성능의 '''[[소방관|소방]][[펌프]]를 동원해 모래벽을 적셔서 무너뜨려버리는''' 창의적인 전술을 사용해 이스라엘이 돌파에만 이틀은 걸릴 거라고 장담하던 바르레브 선을 '''단 2시간만에 돌파'''해버렸다. 여기서 모래벽이라고 하면 우습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전까지 바르레브 선은 이집트군의 국경 도발(방어선에 냅다 포격을 가하는 등)에 이스라엘군이 거의 완벽하게 대응해 왔고 심지어 [[전술핵]]의 폭발력에도 버틸 수 있을 거란 예상까지 나오던 곳이었다. 이집트군은 이러한 바르레브 선의 약점[* 바르레브 라인 사진을 본다면 45도 가량의 경사면을 지닌 높은 벽이기에 병사들이 올라가기 힘들고 차량 기동도 힘들다. 또 이런 모래벽은 총알을 쏘면 그냥 박히거나 포탄이 날아와도 모래 때문에 불발, 터지더라도 유의미한 피해를 못 끼친다. 대신 모래는 물에 젖으면 딱딱한 강도가 부드러워지고 계속 물을 투입해 안쪽부터 무너뜨려 주면 부셔지기에 충분하다.]을 꿰뚫었고 사전에 미니어처와 같은 모의실험까지 거친 후 해당 작전을 실행하는 철두철미함을 발휘하였다. 바르레브 선은 이집트군의 공격에 대비해서 모래벽에서 그치지 않고 운하에 [[석유]]를 뿌린 뒤 불을 질러 도하를 저지하는 [[화공]]을 위해 수중에 파이프라인을 설치하고, 고지대에 콘크리트 벙커를 추가 설치하긴 했는데, 문제는 하필이면 이 날이 욤 키푸르였기에 '''해당 진지에 주둔하고 있던 이스라엘군 병력 대부분이 휴가간 상황이었다.''' 이집트군은 작전 개시 전날 밤에 잠수부들을 동원해 '''파이프라인을 미리 콘크리트로 막아버림으로써''' 이스라엘군의 화공 전법을 무력화시켰으며 고지대의 벙커의 경우 '''똑같은 높이의 토산을 쌓아 올려서 그 위에 전차를 올려 콘크리트 벙커를 격파해버렸다.''' 이 돌파 작전에서 이집트군 병력 8만 명 중 전사자는 단 208명에 그쳤으며, 당시 3만 명 이상의 피해를 예상하고 있던 이집트 수뇌부는 이런 예상 외의 대성공에 기뻐 날뛰었다고 한다. 반면 바레브 선을 방어하던 이스라엘군은 약 1,200명의 사상자와 포로가 발생했다. 해당 작전의 창의성은 기존에는 병역이 면제되던 대학생들까지 입대시켜가며 군 장병들의 질적 향상을 꾀하던 이집트군의 [[와신상담]](臥薪嘗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기상천외한 전술은 전세계 육군 교범에 전장에서 발휘한 창의성의 대표적 사례로 실렸을 정도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후 잘 훈련된 이집트 공수부대와 육군 상륙부대가 수비대 요새 근처에 신속 전개하여, 이스라엘군의 기동예비대인 육군 252기갑사단 예하 기갑여단들의 진격로를 틀어막고 적극적인 대(對)전차 방어전을 구사한다. 이스라엘군은 반격을 위해 전차 부대를 투입하지만 이집트군은 이미 잘 준비된 방어진지에서 '''[[9K11 말륫카|대전차미사일]]을 준비시켜 놓고 있었다.'''[* 1세대 대전차미사일의 운용상 한계점 때문에 보조로 [[RPG-7]]도 준비하였다.] 당연히 유리한 위치를 선점한 이집트군은 이스라엘군의 전차부대를 박살냈고 결국 시나이 반도에 전개된 이스라엘 [[전차]]의 60%인 150여 대를 격파하는 혁혁한 전과를 세운다. 설상가상으로 이스라엘은 1967년 이전에 이집트가 시나이 반도에 부설해놓았던 군사철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이를 거의 철거해서 바르레브 선을 강화하는데 사용했는데, 감히 이집트군에게 긴급한 병력 보충이 필요할 정도의 피해를 입을리가 없다는 오만함에서 온 발상이었지만, 이 조치는 1973년의 재앙적인 첫 며칠 동안 시나이 반도에 전개된 이스라엘 육군에게 끔찍한 결과로 돌아오게 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제4차 중동전쟁/at-3.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제4차 중동전쟁/sa-6.jpg|width=100%]]}}} || 게다가 이스라엘 [[공군]]조차 이집트 방공군의 지대공미사일에게 하루 만에 전 보유 대수의 10% 가까운 전투기를 상실하는 참담한 피해를 입어 이전 전쟁을 항상 승리로 이끌어주었던 우수한 공군력에도 기대기 힘들어졌다. 사실 항공전에서 하루 만에 10%의 손실률이면 거의 기록적인 수준으로, 이런 손실률이 지속된다면 항공전역 수행이 불가능하다. 열흘 내로 공군기가 전멸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스라엘 공군은 개전 초 이런 끔찍한 피해를 입자 지상군 전선이 엄청난 위기에 빠져 있음에도, 일시적으로 지상군에 대한 지원 작전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스라엘 공군의 주요 피해는 이집트 방공군이 보유한 소련제 신형 [[2K12 쿠프]](나토코드 SA-6) 지대공미사일과 23mm 4연장 [[기관포]]를 탑재한 [[ZSU-23-4 쉴카|'쉴카' 대공기관포 차량]]으로 인한 것이었다. 이집트 공군은 애초부터 형편없던지라 방공군의 활약이 컸던 것이다.[* 이때 치명적인 약점으로 이스라엘 공군의 [[A-4 스카이호크]]는 RWR이 없었으며, [[F-4 팬텀 II]]의 RWR은 신규 장비인 SA-6 지대공 미사일 레이더 주파수가 등록되지 않아 울리지 않았다.] 또한, 이집트 공군은 개전 첫날 [[Tu-16]] 전략폭격기를 동원해 AS-5 순항미사일을 이스라엘의 [[텔 아비브]]에 발사해 레이더 사이트를 파괴하는 등 성과가 있었으나, 이스라엘의 방공군과 공군은 [[호크 대공미사일]] 등으로 발사된 순항미사일 25발 중 20발을 요격하는 데 성공하였다. 추가로 이집트 전략로켓군은 [[9K52 루나]] [[탄도미사일]]을 이스라엘 Tasa와 Bir Gifgafa에 있던 사령부와 전투비행단에 발사했다. 민간인 정착촌도 오발된 탄도미사일에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10월 8일에는 이스라엘에서 2개 기갑사단이 더 투입되었지만 이들 역시 이집트군 대전차미사일의 화력 앞에 혼쭐이 나 후퇴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 기갑사단이 큰 피해를 입은 이유는 [[전차]]부대는 [[보병]]부대의 지원이나 [[포병]]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한 채 단독으로 진격했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가장 큰 원인이 이스라엘의 인구 문제로 인한 보병의 부족, 그리고 [[제3차 중동전쟁]]에서 보여준 이스라엘군 기갑부대의 맹활약에 의한 [[전차 만능주의]] 때문이었다. 사실 이스라엘군은 이집트군의 침공 기세를 꺾어야 한다는 위기의식에서 부족한 병력에도 불구하고 일단 반격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었고, 아울러 보병의 대전차 공격 능력 자체를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고 있었다. 이에 '''어떻게든 이집트군이 더 많은 부대를 투입하여 시나이 [[사막]]을 가로지르기 전에 일단 전차부대로 그 기세부터 꺾고 보자'''는 것이 당시 이스라엘군의 계획이었던 것. 이 때문에 공세 주력이었던 2개 동원기갑사단은 아예 사단 보병과 포병이 본토에서 한창 이동 중인 상태에서 전차만으로 선공에 들어갈 정도였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판단은 충분히 합리적인 편에 속했다. 당시 이집트를 비롯한 아랍군 보병의 주력 대전차화기인 [[RPG-7]]은 화력은 좋으나 명중률이 낮고 사거리도 짧았기에 [[베트남 전쟁]] 같은 정글이면 몰라도 교전거리가 길게 나오는 시나이 사막의 특성상 이스라엘군은 적 보병의 방어진지 정도는 전차포로 장거리에서 공격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게임 이론|적국인 이집트도 잘 알고 있었고,]] 실제로 전차전 같은 정공법으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던 터라, 이집트군은 RPG보다 더 강한 [[소련]]제 [[9K11 말륫카|AT-3]] 말륫카(나토 코드명 새거Sagger) 대전차미사일을 이미 대거 들여온 상태였다. 그리고 이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 1. 진지에 숨어서 이스라엘 전차를 기다린다. 이때 AT-3는 뒤에, RPG-7은 앞에 겹겹이 위치시킨다. * 2. 이스라엘 전차가 오면 AT-3를 쏘고 숨는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전차의 시야가 생각 이상으로 좁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위에도 서술하였듯이 당시 이스라엘군은 전차의 눈이 되고 전차를 보호 및 서포트를 해줄 '''보병 없이 전차만으로 돌격했기 때문에''' 이 전략이 더 빛을 발했다. * 3. 엄폐물로 숨으면서 장전하고 장전이 되면 다시 쏘는 식으로 이스라엘 전차를 순차적으로 파괴한다. * 4. 이스라엘 전차가 만약 살아서 엄폐물 방향으로 접근하면 파괴력에 비하여 정확도가 떨어지는 RPG-7으로 처리한다. 이스라엘군은 이미 1960년대 후반부터 국경에서의 분쟁을 통해 말륫카 미사일의 존재와 그 성능을 파악하고 있었고 치명적인 수준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AT-3는 생각 이상으로 강했으며, 무엇보다 이스라엘이 이러한 단점을 이를 뒷받침해줄 기동전략을 통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돌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집트군 대전차 보병의 전술적 역량을 낮게 평가하는 실수로 인해 이스라엘군은 당시 시나이 사막에서 투입 가능했던 전력의 절반 가까이를 상실하는 참패를 겪었다.[* 말륫카같은 1세대 대전차 유도탄들은 이전부터 꽤 보편화된 무기체계였지만, 평원에서의 대규모 대전차전을 실제로 겪어보는 것은 사실상 여기가 처음이었다. 대전차포의 쇠퇴 이후 한동안은 장거리에서 전차를 격파하기 힘들었다는걸 생각하면 이스라엘의 방심이 제대로 찔린 결과물.] 앞서 2일간의 전투에서만 이스라엘군은 300대가 넘는 전차를 잃었고, [[골란 고원]]까지 포함하면 500대가 넘는 전차가 파괴되었다. 훗날 파괴된 전차 중에서 400여 대는 이후 회수해서 수리해 다시 쓸 수 있는 상태였고, 거기다 미국의 긴급원조로 수령한 대량의 패튼 시리즈와 아랍 측의 [[T-55]], [[T-62]] 전차도 다수 노획해 종전 후에는 전차 보유 수가 더 늘어나긴 했지만, 전차를 젊은 간부의 관이라 부를 만큼 인원 손실이 커 노련한 전차 승무원들을 잃은 것은 회복하지 못했으며 전차 보유수가 늘어났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전쟁 후의 이야기로 전쟁 중이던 당시에는 가히 뼈를 박살낸 치명타를 입은 상태였다.[* 당시 이집트군은 그야말로 맹훈련을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군 전차병들의 피해가 더 컸다. 거기다가 이스라엘의 [[M48]] 전차들은 유압식 회전장치를 사용했기 때문에 미사일이나 RPG를 맞으면 '''그대로 불이 붙어 내부가 화염지옥이 되어버렸다!''' 피해도 피해지만 [[PTSD|무전을 통해 불타 죽어가는 전우들의 처절한 비명소리를 들어야 했던 이스라엘 전차병들의 심리적 타격]]도 컸다. 그 후 [[메르카바 전차]] 회전부에 여러 가닥의 추 달린 사슬을 달아 놨다.][* 이전까지 아랍군은 '''장전법을 몰라서 한 발 쏘고 전차에서 도망가는''' 일까지 있을 정도로 훈련이 부족했다.] 이집트군은 소련식의 조직적인 보병 중심 대(對)전차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이스라엘군을 끌어들였다. 특히 이 시점에서 이스라엘군의 반격에 맞선 이집트군은 이미 전날 밤 [[운하]] 일대의 원래 방어 책임을 맡고 있던 이스라엘군 만들러 소장의 252기갑사단 전차 전력의 60%를 대전차 방어전에서 격파할 정도로 그 역량을 유감없이 과시하고 있었던 상태였다. 그러던 차에 전날보다 더욱 취약한 상태로 공격해 오는 이스라엘군 2개 사단에 맞서 말 그대로 최고의 선전(善戰)을 펼쳤던 것이다. 그나마 이스라엘군의 반격은 이집트군이 진격을 멈추고 방어선을 구축하게 만드는 효과는 거두어 결국 이집트군의 침공 기세를 꺾는다는 당초 목적 자체는 달성했다. 대신 만약 이집트가 작심하고 제대로 밀어붙일 경우 이에 맞서기 어렵다고 여겨졌다. 원래 소련식 군사 교리의 특성상 제대(諸隊: 모든 군대/부대)는 본래 목표했던 작전선까지 전진하면 상황을 재평가하고 다음 작전을 준비한다. 한국 전쟁에서도 이러한 특성이 보이지만, 중앙 집중화된 지휘 체계상 각 제대는 원래의 목표선까지 진출하면 독자적으로 판단하는 것보다 상태를 보고하고 피아 간의 상황을 분석해서 다음 지시가 내려올 때까지 대기하게 된다. 당시 이집트 지휘부는 지난 전쟁에서 연이은 패배를 당했던 이집트군이 예상 이상의 전공을 세우자 이것이 이스라엘의 함정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고, 거기다가 이스라엘을 너무 밀어 붙일 경우 '''미군이 전면 개입하거나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사용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었다.'''[* 당시 이집트 수뇌부도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보유했을 가능성을 충분히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집트의 목적도 수에즈 운하 회복이었지 이스라엘의 멸망이 아니었으므로 더 이상 진격할 필요도 없었다. 아사드의 계획 역시 골란 고원의 탈환과 1967년 국경선의 회복이었으며, 소련 측에 시리아군이 골란 고원을 점령하는 대로 즉시 유엔 안보리에 정전 결의안을 제출하여 이스라엘의 반격을 막아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이스라엘 내부로 깊숙히 진격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는 이집트/시리아군의 역량이 동원을 마친 이스라엘군과 정면대결하여 승리할 정도의 수준이 되지 못한다는 정확한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따라서 수적으로 극히 열세한 이스라엘 현역부대를 초전에 밀어붙여 실지를 회복하고, 그곳에서 방어전을 벌여 이스라엘군을 물리친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시리아군의 계획은 어쨌든간에 이스라엘군에게 동원 및 재정비를 마칠 시간과 공간을 허용한다는 본질적인 약점을 내포하고 있었고, 이 취약성은 욤 키푸르 전쟁의 결말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한편, 시리아군 역시 초전에 [[헬기]]를 이용한 대규모 특수부대 강습으로 헤르몬 산의 이스라엘군 관측소 겸 진지를 한 시간 만에 점령하고,[* 이스라엘군은 시리아군이 이런 작전을 벌일 수 있을 거라 예상치 못하다가 과감한 헬리본 작전에 제대로 허를 찔렸다. 당시 이스라엘군은 시리아군을 얕본 나머지 헤르몬 산 관측소에 전투병력으로 고작 1개 분대만을 배치해두고 있었다. 나머지는 전부 통신감청부대를 비롯한 비전투인력이었다. 결국 탈출하는 데 성공한 이스라엘군은 불과 11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 외에는 모두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기갑부대는 완강하게 저항하는 이스라엘군 제188기갑여단의 방어선을 남단에서 수적(數的) 우위로 돌파하며[* 이때 시리아군 전차병들은 동료 전차들이 격파되면 그대로 후퇴하거나 심지어 장비를 유기하고 도망치던 지난 전쟁과는 달리 정신 무장도 탄탄하게 되어서 난전에도 굳건히 진격해 전투에 임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때 제188 "바라크" 기갑여단은 다른 사람도 아닌 '''여단장과 부여단장'''이 전사할 정도의 피해를 입고 사실상 전멸했다.] 쾌조의 진격을 거듭해 7일에는 [[요르단 강]] 가까이에 이르렀다. 시리아군 기갑부대가 골란 고원 서쪽 저편에서 빛나는 갈릴리 호수를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거리까지 진출한 것이다. 다만, 이때 시리아군은 소련식 교리에 치중한 나머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다. 그것은 바로 탄약도, 연료도 아직 여유가 있는 상황에서 요르단 강에서 불과 100미터 정도의 지근거리까지 접근한 부대가, 제대(諸隊: 모든 군대/부대)는 원래 목표한 작전선까지 전진하면 상황을 재평가하고 다음 작전을 준비한다는 교리를 철저히 지키느라, 자신들의 작전 지역을 넘어서 요르단 강을 도하하여 이스라엘 영내로 진격하는 것을 포기한 것이다. 사실 시리아로서는 승리의 경험이 없다 보니 이것이 실제로 진격을 해야 하는 상황인지, 이스라엘측의 유인 작전인지 구분할만한 전술안을 가진 지휘관이 없던데다, 멋대로 행동했다가 최상층 지휘부에게 찍혀서 숙청당할 위험도 있기에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던 것. 이때 시간을 끌지 않고 요르단 강을 넘어 진격했다면, 이스라엘군의 동원사단이 오기 전에 전쟁이 끝날 수도 있었다. 이처럼 상황이 심각하게 변하자 다급해진 이스라엘군은 일단 가장 가까운 시리아군부터 몰아내기로 결정했다. 당장 이집트 방면은 시나이 반도의 영토를 내주면서 시간을 벌 수 있었으나, 시리아 방면은 골란 고원이 돌파당하면 바로 이스라엘의 심장부가 시리아군의 공격 앞에 놓이게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뻥 뚫려있는 시나이 반도와 달리, 요르단강과 갈릴리 호수에 의해 접근로가 제한되는 골란 고원의 경우 동원이 완료된다고 해도 '''브노트 야코브 다리나 아리크 다리 같은 주요 교량이 탈취당하면 반격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도 있었다'''. 이스라엘은 가용 병력 대부분을 골란 고원에 쏟아붓는 도박을 시작했다. 핵심은 이스라엘 중부에서 막 이동을 개시한 무사 펠레드의 제146기갑사단이었다. 이들이 갈릴리 호수 남쪽에서 발진해 시리아군의 공격축선 좌측방을 강타하기만 한다면 고원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나 촉박했다. 엄청난 대가를 치르면서 동원기갑사단이 골란 고원으로 투입될 시간을 번 것은 현역 부대들이었다. 전쟁 직전 시나이 반도에서 이동하여 골란 고원 방어선 북단을 담당한 이스라엘군 제7기갑여단, 그중에서도 [[https://en.m.wikipedia.org/wiki/Avigdor_Kahalani|아비그도르 카할라니]] 중령이 이끈 제77전차대대는 1:10의 수적 열세 하에서 몰려드는 시리아군 기갑부대를 말 그대로 혈전(血戰) 끝에 격퇴했다. 결정적인 순간은 시리아군이 1제대 보병사단은 물론 기갑사단과 [[공화국 수비대]] 전차여단까지 동원해 최후의 공세를 시작한 10월 9일 찾아왔다. 7기갑여단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시리아군의 공격을 저지하려면 노출된 개활지를 통과해 야트막한 언덕의 사격대를 점령하는 것 말곤 다른 방법이 없었지만, 2개 중대 규모로 쪼그라든 여단의 전차들은 카할라니 중령의 전차가 앞장서는데도 뒤따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흘 동안의 밤낮 없는 격전에 지치고 수많은 전우들을 잃은 탓에 사기가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겨우 29세의 나이로 여단 내에서 죽거나 다치지 않은 유일한 대대장이 된 중령은 부대가 무너지기 직전임을 직감하고 돌아와 "우리 바로 앞에서 진지를 오르는 시리아군의 용기를 봐라. 우리가 저들보다 약한가? 우리가 저들보다 겁쟁이인가? 앞으로 나아가 나와 함께 방어선을 구축하자. 전진!"이라고 독려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탈진한데다가 탄약마저 거의 고갈된 7기갑여단의 마지막 한 줌 남은 전차병들은 '''[[겁쟁이]]'''라는 원초적인 단어에 반응했다. '''그들은 겁쟁이가 아니었다.''' 한 소대장이 조종수에게 "앞으로!"라고 외친 것을 시작으로 이스라엘군 전차들이 카할라니와 대열을 맞춰 달려나갔다. 시리아군 전차부대가 사격대를 탈취하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진지를 점령한 여단은 사투 끝에 적 전차 60~70대를 격파하면서 시리아군의 마지막 공세를 저지해냈다. 이날 전투가 끝나고 여단에 남은 가용 전차는 겨우 7대였다. 7기갑여단이 사수하던 부스테르 능선과 헤르모니트 능선 사이로 향하는 골짜기에는 시리아군 전차 수백 대가 격파된 채 버려져 있었다.[* 시리아군의 골란고원 북부 제1제대를 맡은 제7보병사단장도 이곳에서 사망했다. 다만 전사했다는 설과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다는 설이 나뉜다.] 후일 이곳에는 그 참혹한 광경에서 유래한 지명이 붙었다. 바로 "눈물의 계곡(הַבָּכָא עֵמֶק, Valley of Tears)"이다. 방어 책임 부대인 제188기갑여단이 사실상 전멸하면서 거대한 돌파구가 뚫려버린 골란 고원 남부에서도 자발적으로 달려온 비번 장병들과 동원예비군 전차들이 영웅적인 전투를 치렀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인 [[https://en.wikipedia.org/wiki/Zvika_Greengold|즈비카 그린골드]] 중위는 단 3대의 전차로 188여단에 달려와 전투를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전차 세 대는 전부 격파됐으며, 188여단장, 부여단장, 작전과장이 모두 전사하여 지휘부마저 붕괴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중위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갈아탄 전차 단 한 대로 탭라인 도로를 따라 접근하는 시리아군 전차 수십대와 밤새 야간전투를 벌였다. 결과는 놀라웠다. 중위는 끝까지 살아남은 것은 물론 골란 고원 내 이스라엘군 최대의 거점인 나파크 기지로 향하는 시리아군 1개 전차여단을 하룻밤 동안 막아내어 동원예비군의 반격에 발판을 마련했다. 전후 카할라니 중령과 즈비카 중위는 이스라엘군 최고 무공훈장인 용맹훈장을 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